[김경희의 사람사는 이야기] 할머니의 책가방..."하나 둘 서이 너이"
[김경희의 사람사는 이야기] 할머니의 책가방..."하나 둘 서이 너이"
  • 한국관세신문
  • 승인 2019.06.19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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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강하고 어머니는 더 강하다.

인생의 8할을 농사만 짓던 할머니들이 책가방을 들었다.

화요일 금요일 학교 가는 날, 옥천 안내면 행복한 학교 할머니 학생들. 할머니들은 배운 것 없지만 자식들은 다들 선생님 박사님으로 키웠다. 그녀들의 내공이다. 골 깊은 주름살이 어여쁜 훈장이 됐다. 현란한 언어의 인문학 강의보다 할머니가 불쑥 내뱉는 한마디가 어느 책 속의 명문보다 더 강렬하다.

 

할머니들의 책가방.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이면 동네 앞으로 학교 셔틀버스가 온다. 30명의 어르신들이 학교에 모여 한글, 산수, 체조를 배우신다. 뒤 늦은 공부지만 어르신들에겐 배움 자체가 기쁨이다.(사진=추억의 뜰 제공)/ 한국관세신문
할머니들의 책가방.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이면 동네 앞으로 학교 셔틀버스가 온다. 30명의 어르신들이 학교에 모여 한글, 산수, 체조를 배우신다. 뒤 늦은 공부지만 어르신들에겐 배움 자체가 기쁨이다.(사진=추억의 뜰 제공)/ 한국관세신문

인생이 뜻대로 안 된다. 자식에게 남편에게 헌신하는 것이 그게 아까운 게 아녀. 결국 그게 내 인생 이었어. 이 나이에 공부를 하게 됐으니 이만하면 성공 한 거야. 참고 산 값 이지’

웬일인지 학교에 할아버지들이 안 보인다. 할아버지들은 당신들이 글을 모르는 것을 남들에게 드러내기 싫어하신다. 할머니들은 당당하다. 배우지 않은 것이 아니라 배우지 못한 것이다. 당신의 환경에도 순응했고 오랜 세월 딛고 일어섰다. 여자는 강하고 어머니는 더 강하다.

문해학교라 국어 산수를 배운다. 가나다라 한 자 한 자 배워서 시집도 만들어 발표하신 분 들이다. 다음 시간은 “하나 둘 서이 너이 배울 차례여” 배움의 기쁨을 맛보는 표정이 역력하다.

똑같은 가방 안에는 큼지막한 국어 책 산수 책이 나란히 키를 맞추고 앉았다. 연필로 삐뚤빼뚤 눌러 쓴 흔적이 역력한 필체는 정성이 오롯이 담겨 뭉클하다. 어설픈 필체가 할머니 인생의 단면이지만 책가방 품고앉아 함박웃음 짓는 주름진 미소가 할머니의 진짜 모습이다.

격동의 근 현대사속에서 해방과 6.25를 거쳐 농경사회의 안주인으로 산업화의 뒷전으로 밀려나기까지 그녀들의 인생사는 녹녹치 않다. 하지만 그녀들이 있었기에 역사의 강은 흐름을 멈추지 않았다. 살아있는 민초인 그녀들. 그 삶이 바로 민초들의 역사가 되었다.

누구는 전쟁에서 식구를 잃었고 누구는 시집살이 모질어 울기도 많이 했다. 그래도 베틀에 올라 베를 짜고 들판에 나가 밭을 매고 얼음물에 손 담그고 빨래한 세월은 같다.

매주 화요일 금요일이면 마을 앞으로 행복한 학교 셔틀 버스가 운행을 한다. 차 시간보다 훨씬 일찍 나와 급우들을 만날 생각에 설레고 학교에 도착하면 오롯이 대접만 받는다. 식사도 수업도, 그간의 헌신을 배움으로 보상받고 새로운 날들이 희망이며 노후의 기쁨이다.

입성이 초라해도 인생에 자신감이 있다. 남한테 아쉬운 소리 할 일 없는 진정한 멋쟁이들이다. 그만큼 열심히 잘 살아왔다. 누구에게든 인생을 말할 수 있고 박사아들에게도 인생의 선배로 가르침을 줄 수 있다.

학교 공부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몸소 알려주는 분들이다. 낯선 사람들을 해맑은 웃음으로 맞고 이제 이름을 쓸 줄 알게 된 것을 진심 기뻐하며 당당하게 자랑한다. 세상에서 가장 고운 꽃은 할머니의 주름이 만든 미소다.

가장 아름다운 향기도 사람의 향기다. 꽃은 붉고 어여뻐도 열흘을 못가지만 사람의 향기는 만리를 간다. 넓고 깊은 사람의 향기, 인향만리 (人香萬里)에 숙연해진다.

 

충북 옥천시 안내면 '행복한 학교' 개나리반 할머니들. 어르신들은 한글을 공부하시고 시집도 만드셨다.(사진=추억의 뜰 제공) / 한국관세신문
충북 옥천시 안내면 '행복한 학교' 개나리반 할머니들. 어르신들은 한글을 공부하시고 시집도 만드셨다.(사진=추억의 뜰 제공) / 한국관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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