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희의 사람사는 이야기] 독립유공자 후손들에게 듣는 '숨겨진 미시사'
[김경희의 사람사는 이야기] 독립유공자 후손들에게 듣는 '숨겨진 미시사'
  • 한국관세신문
  • 승인 2019.08.01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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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최후경 선생과
청양에서 활동한 김정한 선생의 독립운동사

 

김경희 작가(추억의 뜰)
김경희 작가(추억의 뜰)

공적조서로만 남아있던 독립유공자들의 기록을 후손들의 입을 통해 자서전, 『독립 유공자 미시사』 로 제작중이다. 작금의 반일 운동과 항일 100주년 기념의 교착점에 선 2019년 8월. 뜻 깊은 독립운동 후일담으로 저린 가슴을 부여잡는다.

후손들은 ‘유공자의 집’ 문패만으로도 감격한다. 하물며 숨겨진 독립운동 미시사로 엮인 책은 큰 자긍심을 갖기에 충분하다. 후손들이 목도한 선대 어르신의 죽음을 담보로한 항일운동과 남은 가족들이 짊어져야 할 짐.

조부모를 통해 전해들은 공적조서의 사실을 들으며 손톱을 빼내는 고문의 흔적을 짐작하는 것만으로도 통증은 마디마디로 전달됐다. 혈육이 아니어도 그 숭고한 애국심과 모진 고충에 깊은 감사와 애도를 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동일한 역사를 갖고 있는 대한민국의 국민이기 때문이다.

 

독립유공자 최태경 선생 이야기 

아버님은 한학자셨다. 혜택을 누린 만큼 나라의 독립을 위해 정신이든 금전이든 갚아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다. 아버님은 독립자금을 일부러 허술하게 보이는 헛간 깨진 독에 넣어두셨다.

어느 날 불시에 들이닥친 일본 순사들이 거적 대기를 한 장 한 장 들쳐 낼 때마다 어머니의 온 몸은 경련으로 떨렸고 얼굴빛은 이미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려버렸다. 독립자금이라도 발견 되는 날이면 이미 자취를 감추신 아버님을 쫓는 포위망은 더 좁혀질 것이며 온가족이 고초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아버님이 독립운동 본부와 나누었던 독립자금 송금 약정서를 다시 복원하여 간직하고 있는 최선생님
최연수씨는 아버지 최태경 선생이 독립운동 본부와 나누었던 독립자금 송금 약정서를 다시 복원하여 간직하고 있다.(사진=추억의 뜰 제공)/한국관세신문

더 두려운 일은 독립군을 돕는 활동을 포기해야만 하는 절대 절명의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호흡이 고르지 못한 숨소리만 나지막한 신음으로 들려왔다. 우리들도 사시나무 떨듯이 떨고 있었다. 

일본 순사는 독립자금을 찾지 못한 분풀이를 마지막 남은 거적 대기를 발로 걷어차며 쏜살같이 대문을 빠져나갔다. 아마도 다음 번 어느 집으로 가서 더 악랄한 악행을 저지를 것은 불을 보듯 훤했다.

하루하루 숨 쉬는 것조차 힘든 시절이었다. 천운으로 일본 순사가 나가자마자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토해냈지만 어머니는 극도의 긴장감을 내려놓을 수 없어 그 자리에서 바로 혼절하셨다.

 

독립유공자 김주현 선생 이야기

어머님은 1919년 1월 밤이면 호롱불에 실눈을 뜨고 바느질을 하셨다. 밤마다 광목천에 수를 놓으시곤 장 서랍에 넣어두셨다. 우리도 보면 안되는 귀중한 수예품이라고 생각했다. 며칠이 지나자 어머님은 아버님께 고운 수를 놓은 수예품 스무 장을 보자기에 싸서 드렸다.

그제서야 우린 그 광목천의 고운 수가 태극기였던 것을 알게 되었다. 아버님은 그 태극기를 들고 동네 분들과 마을 산으로 올라 태극기를 곳곳에 숨겨놓으시고 만세운동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내려오셨다.

이후 3.1절을 지나 청양의 장날인 4월3일에도 아버님은 900여명의 주민들을 모아 만세운동을 주도 하셨다. 즉시 일본군에게 잡혀간 아버님은 며칠 소식을 알 수없어 가족들의 애를 태웠고 피를 다 말렸다. 나흘이 지난 후 동네 아저씨 등에 업혀 오는 아버지를 발견했다.

 

김월규씨 부부가 대전 현충원에 안장된 아버지 독립유공자 김주현 선생 묘소에 참배후 찍은 사진(사진=추억의 뜰 제공)/한국관세신문
김월규씨 부부가 대전 현충원에 안장된 아버지 독립유공자 김주현 선생 묘소에 참배후 찍은 사진(사진=추억의 뜰 제공)/한국관세신문

이미 손이 축 늘어져 마치 주검과도 같았던 아버님. 몽둥이로 90대를 맞은 아버님은 이미 산 사람이 아니었고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시고 말았다. 가족들의 애끓는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 가 없었지만 어머님은 할 일을 한 아버지를 편히 보내드리는 것이 남은 우리가 할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무서울 만큼 담담했던 어머님도 뒤꼍에서 홀로 울음 삼키시는 것을 매일 보며 나또한 소리 내어 울 수밖에 없었다. 어린 나의 독립에 대한 열망은 호롱불 밑에서 수놓은 태극기를 처음 본 그날부터였다.

이제 잊혀져간다. 후손 분들도 90을 바라보는 연세가 되었고 이제 그날의 일들을 직접 증언할 수 있는 이들이 한 분 두 분 사라져가고 있다. 역사의 뒤안길로 숨겨진 그들을 통해 우리는 시대의 아픔을 뛰어넘어 분노를 발전과 희망으로 승화시켜야 할 때다. 물론 그 날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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