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자의 삶과 문학 이야기] 그 옛날 오토바이 맨, 정수용씨 다시 태어나다[3회]
[이연자의 삶과 문학 이야기] 그 옛날 오토바이 맨, 정수용씨 다시 태어나다[3회]
  • 한국관세신문
  • 승인 2019.11.14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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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전부터 잡기로 소문난 양반,
"미안하고 고맙다"며 허리 주물러 줘" 

 

이연자 작가(사진=추억의 뜰 제공)
이연자 작가(추억의 뜰 제공)

내가 비록 시골 할매라 아는 것이 없다 해도 세상의 많은 진리 중에서 으뜸은 아마도 '남자는 평생 철들기 어렵다' 정도는 익히 알고 있다. 그런덴 믿기지 않은 일이 생겼다. 사람이 열 번 바뀐다더니 영감이 갑자기 늦게 철이 나서 언제부턴가 술도 조금씩 자시고 주사도 줄었다. 돈 욕심도 생기고 살림도 거들기 시작하였다.

이웃들도 80년을 한 마을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라 우리 영감의 과거를 다들 알고 있다. 그래서 다들 영감의 변화에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지금은 더덕농사에 혼신을 다한다. 더덕 농사는 풀매기 작업이 골칫거리인데 아침 마다 쑥쑥 자란 풀들한테 더덕을 보호해줘야 하는 농사라 여간 잔일이 많은 게 아닌데 나이 들어 더덕농사를 하고 있으니 남편이 변하기는 변했다. 한 여름에는 하루에도 풀들이 키가 쑥쑥 자라 힘에 부칠 법도 한데 웬일인지 지성이었다. 처음에는 다들 흉내만 내다 말거라고 이구동성 이었는데 그게 아니다.

동네 성님 동생들이 입만 열면 "만순네 아버지 정수용씨가 나이 먹을수록 철난다"고 노래를 부른다. 결혼 전부터 잡기로 소문난 양반이었다. 나한테 잘 보이려고 오토바이 빌려 타고 학생모 삐딱하니 썼던 양반이라 여든 넘어 조신해진 모습에 다들 놀라기는 한다. 하도 밭을 많이 매서 허리가 꼬부라져 버린 내게 남편이 미안하고 고맙다고 말하며 내 허리를 주물러주다가 오늘까지도 모산 마을의 전설이 되었으니 사람에 대한 기대는 끝까지 가져볼 일이다. 

내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작가 양반이 왔다. 처음엔 쑥스럽고 자랑거리가 없어 말하기 싫었지만 옛날 얘기하다보니 이야기가 술술 나왔다. 자식도 들어주지 않는 시골 할매 이야기를 듣고 울고 웃어준 작가가 고마웠다. 수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거 같다. 작가가 나보고 그 세월을 잘 살아줘서 고맙단다. 헛 살지는 않은 모양이다. 옆집 동생도 같이 거들다가 그 옛날 속상해서 저수지에 빠진 얘기하다 눈물 쏙 뺐다. 이야기하고 나니 나도 동생도 후련하다. (사진=추억의 뜰 제공)/한국관세신문
내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작가 양반이 왔다. 처음엔 쑥스럽고 자랑거리가 없어 말하기 싫었지만 옛날 얘기하다보니 이야기가 술술 나왔다. 자식도 들어주지 않는 시골 할매 이야기를 듣고 울고 웃어준 작가가 고마웠다. 수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거 같다. 작가가 나보고 그 세월을 잘 살아줘서 고맙단다. 헛 살지는 않은 모양이다. 옆집 동생도 같이 거들다가 그 옛날 속상해서 저수지에 빠진 얘기하다 눈물 쏙 뺐다. 이야기하고 나니 나도 동생도 후련하다. (사진=추억의 뜰 제공)/한국관세신문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어 마누라 아픈 곳을 챙겨주니 이놈의 영감이 갈 때가 됐나 싶어 내심 뜨끔 하기도 했다. 하여튼 인생 막바지에 참고 살았던 내 인생에 꽃이 활짝 핀 것 같다. 옥천의 작은 시골 안남면 지수리 모산마을. 그곳에서 태어나고 동무로 자라 스무 살에 서로 결혼을 했다. 그리고 80년 넘게 이 작은 마을에서 아롱이 다롱이 낳고 아웅 다웅 살고 있다. 

우리 영감과 나도 숙명 같은 질긴 인연이다. 그래서 이제라도 서로 보듬고 토닥토닥 해줄 일만 남았다. 영감이 더덕농사를 못해 먹겠다고 손을 놓는 날이 와도 나는 나무라지 않을 것이다. 한 순간이라도 나를 아껴주고 농사에 전념했던 기억만 갖고 남은 날을 함께 할 것이다.

노년의 우리 모습이 이제 처마 밑에 주렁주렁 달린 곶감 같다. 둥시 감나무가 유난히 많은 우리 모산 마을. 감 껍질을 수백 개를 까서 실에 매달았다. 우리는 해마다 이맘때면 늘 하는일인데 외지인들은 그 시골 집 풍경에 카메라를 눌러댄다. 그게 뭐라고. 다 남의 떡이 커 보이고 좋아 보이는 이치 같다. 

수분은 쪽쪽 빠져 겹겹이 주름이지만 흉내 낼 수 없는 당도로 호랑이도 맥 못추게 하는 곶감. 우리 할매들 인생살이가 그렇듯 이렇게 인생의 달콤한 맛을 아는 '어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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