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희의 사람사는 이야기] 바이러스의 순기능, 문화
[김경희의 사람사는 이야기] 바이러스의 순기능, 문화
  • 한국관세신문
  • 승인 2020.02.14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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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희 작가(추억의 뜰)
김경희 작가(추억의 뜰)

 

'기생충'이 아카데미상에 기생하던 날,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오스카상 4관왕을 차지했다. 우울했던 국민들 마음에 잠시 기쁨과 희망을 주었다.

거대자본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상이라고 폄하하는 이들도 있지만 봉준호가 천재 감독이며 대단한 창작가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문화는 그렇게 손에 잡히지 않는다. 순기능을 하는 바이러스처럼 우리 가슴으로 부지불식간에 파고들어 잠식한다.

충청북도에 인구 5만의 작은 소읍 옥천이 있다. 우스갯소리로 골목을 지날 때 어깨를 부딪치는 사람들이 다 시인이라고 할 만큼 시를 사랑하고 문화를 향유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향수 시인 정지용의 고향이다.

'향수' 라는 시의 발원지가 바로 시인 정지용의 고향 옥천이다. 시인의 우울한 어린 시절이 시인의 감성을 흔들어 오히려 '향수'라는 대작을 낳게 했다.

섬세한 언어구사, 감성의 세포 하나까지 다 건드리는 유려한 문장으로 누구에게나 고향을 한 눈에 그릴 수 있도록 부추긴다. 그 작은 소읍에 지역 신문이 있다. 옥천신문이다.

인구 5만에 유료 구독자가 4만이다.  1인 세대, 노부부 세대가 많은 옥천 현실을 감안하면 거의 모든 가정에서 유료 구독하고 있다는 뜻이다. 무료로 줘도 보지 않는 지면 신문을 거금(?) 만원을 내고 본다. 자부심 때문이다.

정지용 시인의 고향 마을이라는 자부심에서 비롯됐다. 고향을 사랑하고 읽고 쓰는 문화 코드에 익숙해진 시골 양반들이다.

옥천 장날 오래된 칼국수 명소에 갔다. 시장 건물 외벽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정지용 시인. 시인의 얼굴은 옥천의 얼굴이다. 그의 얼굴을 보면서 순간이라도 나쁜 생각을 할 수 없다. 왠지 시라도 한 수 읊어야 할 것 같다. 그것이 정지용 시인의 힘이다.

한 사람의 힘, 문화를 이끄는 한 사람의 힘이 정서를 다듬지만 그건 의식으로 귀결된다. 그래서 한 사람의 작은 생각이 큰 물결을 이루고 지역과 사회의 민도(民度)를 형성한다. 우리가 감성을 놓치지 말아야 할 이유기도 하다.

1946년 창경원에서 제자들과. 왼쪽에서부터 제자 김지수, 세번째가 장녀 구원, 네번째가 정지용이다.(옥천신문)/한국관세신문
 

 

'향수'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엔 재가 식어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돌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정지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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