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숙의 인생이야기)스승의 긴 그림자...제자들에게 내리사랑으로 이어져
(이기숙의 인생이야기)스승의 긴 그림자...제자들에게 내리사랑으로 이어져
  • 한국관세신문
  • 승인 2019.05.16 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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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오후, 구희로부터 전화가 왔다. “선생님, 저 첫 월급 탔어요. 제일 먼저 선생님께 선물 드리고 싶어서요.”
쉰 여섯 내게도 선생님이란 늘 맘설레는 존재, 빛나던 내 눈빛을 말해주실 때는 어린 시절 그리움이 물결처럼...
이기숙 작가
이기숙 자서전 작가

 

스승의 그림자도 밟으면 안된다고 배움 받던 64년생인 나에게조차 스승이란 말이 쩍쩍 갈라진 저수지마냥 메마르게 들린다.

이 현실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참된 스승이 없는 것도 아니고 참된 제자가 없는 것도 아닌데 미디어에 오르내리는 사건들이 아름다운 교육 현장을 도매급으로 팔아넘긴다.

나는 아이들과 늘 함께 있는 학교 선생님도 아닌데, 아이들의 진로를 머리 맞대고 함께 고민해주는 담임교사도 아닌데, 그저 일주일에 겨우 한 번 만나던 글쓰기 선생에 불과했는데 20년간 내게 편지를 보내주고 안부를 물어주는 착한 제자들이 있다.
 

이젠 성인이 된 제자 구희, 성훈. 7살때 만나 고2까지 수업했던 애제자들과의 인연은 22년.
이젠 성인이 된 제자 구희(가운데), 성훈(오른쪽). 7살때 만나 고2까지 수업했던 애제자들과의 인연은 벌써 22년째 이어져오고 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만나 12년을 내게 논술을 배우던 구희, 성훈이는 29살이 된 지금에도 때때로 내게 전화를 걸어와 안부를 묻고 밥을 함께 먹는다. 이젠 성년이 되어 군대를 다녀오고 직장생활을 하느라 정신이 없을 것임에도 나를 만나 지난날을 얘기하면서 한바탕 웃고 간다. 그들만의 스트레스 해소법이란다.

추석을 이틀 앞둔 재작년 어느 오후, 구희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가 선약이 있어 나가려던 참이라고 하니 잠깐만 시간을 달라며 기다리란다. 승강장에 나가 기다리는데 버스에서 다급히 내리는 아이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고 “선생님!” 하면서 내미는 손에는 작은 종이가방이 들려있었다.

“선생님, 저 첫 월급 탔어요. 제일 먼저 선생님께 선물 드리고 싶어서요. 추석 전에 꼭 드리고싶었어요.” 쑥쓰러움이 잔뜩 묻어있는 아이의 얼굴이 어찌 그리 예쁘고 사랑스럽던지 확 안아주고 싶었다.

<소나기>의 윤초시댁 손녀딸처럼 뽀얀 피부를 지닌 이슬같은 아이, 차 한 잔도 마실 새 없이 쾌청한 가을 하늘을 이고 한 정거장을 함께 걸은 후 아이는 돌아갔다.

첫 월급 선물을 빨리 내게 건네주고 싶어 겨우 5분 얼굴 보고 되짚어 버스 타고 돌아간 아이. 그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눈에 넣고 싶어 버스가 모퉁이를 돌아설 때까지 지켜보았다.

진로 문제로 끊임없이 고민하면서도 흔들림 없이 자기 길을 향해 매진하는 성훈이도 내 삶에 약초같은 아이다. 내 존재가 허무하다 느낄 때 애들은 내게 나타나 나를 살아있게 한다. 끊임없이 사색하고 고민하면서도 올바른 삶의 주인공으로 살아가고자 애쓰는 내 자랑스러운 제자들.

쉰 여섯이 된 내게도 삶의 모델이 되어주시는 선생님이 계시다. 중2 때 국어 시간, 이광수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줌으로 어린 감성을 촉촉하게 적셔주시던 박영저 선생님, 나는 오랫동안 주인공 안빈의 사랑에 빠져 잠을 설쳤고 그때부터 문학에 도취되었다.

그리고 밤이 깊어 새벽이 올 때까지 5촉 전구 아래서 소설을 읽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리고 나중엔  국문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이순이 넘은 나이지만 여전히 품위있는 박영저선생님.중학교 2학년이었던 나를 문학소녀로 만들어주셨던 선생님과 인연은 45년간이난 이어져 오고 있다.
이순이 넘은 연세지만 여전히 품위있는 박영저 선생님(오른쪽). 중학교 2학년 나를 문학소녀로 만들어주신 선생님과 인연도 어느덧 반백년이 다 됐다.

선생님과는 지금도 만남의 시간을 갖는다. 선생님이 반짝반짝 빛나던 당시의 내 눈빛을 말해주실 때는 공연히 설레고 몽실몽실 그리움의 물결이 인다. 자주 뵈어도 스승의 날이면 어김없이 편지를 쓰고픈 건 내 건강하고 아름답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스승의 그림자는 인생 구석구석에 드리워져 삶을 풍부하게 하고 바른 품성을 지닌 사람으로 살아가려 노력하게 만든다. 오늘도 많은 참된 스승들이 교육현장에서 제자들의 아픔과 힘겨움을 쓸어주고 덜어주기 위해 조용히 손을 내밀고 마음을 함께 하신다.

교육자가 되기 위한 마음가짐의 첫 자리에는 분명 아이들을 따뜻하게 품어주고 올바른 삶으로 이끌겠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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