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자의 삶과 문학 이야기) 한 사람의 살아온 날들, 그 서정의 힘
(이연자의 삶과 문학 이야기) 한 사람의 살아온 날들, 그 서정의 힘
  • 한국관세신문
  • 승인 2019.06.05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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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기적이다 / 인간은 신비이다 / 희망은 불멸이다.
희미한 불빛만 있다면,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박노해)
이연자 작가(추억의 뜰)
이연자 작가(사진=추억의 뜰 제공)

 

"문풍지 우는 겨울 밤이면 윗목 물그릇에 살얼음이 어는데 할머니는 이불 속에서 어린 나를 품어 안고 몇 번이고 중얼거리시네 / 오늘 밤 장터 거지들은 괜찮을랑가, 소금 창고 옆 문둥이는 얼어 죽지 안을랑가 / 아! 나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낭송을 들으며 잠이 들곤 했었네" (김지하)

 

한 사람의 살아온 날들 그 서정의 힘.

난 이야기 채집가로서 이 땅에서 꿋꿋하게 살아오신 많은 엄니들과 아버지들의 구술을 듣고 기록하고 있다.

유년의 나로 거슬러 올라가면 지금의 내 모습의 기저를 발견할 수 있다. 나의 아버지는 15세 연하인 시골 훈장님의 막내 딸과 결혼하셨다. 엄마는 처음에 일본에서 아들 셋을 낳으셨는데 제일 큰 오빠는 보모가 실수로 떨어뜨려서 죽었다고 한다. 부모님은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서울로 돌아와서 변두리 인생을 사셨다. 나는 4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막내 오빠와 나는 서로 바뀌어서 태어나야 했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큰 오빠는 철제품을 만드는 가내수공업을 하였는데 건달끼가 있었는지 항상 무언가를 벌이면 폭삭 망해 먹고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온 가족이 뚝방촌으로 이사했다. 뚝방촌은 자그마한 판자집들이 일렬로 나란히 늘어져 있었다. 방 1개에 엄마와 나머지 식구들이 다 같이 살았고 거실 개념의 공간이 있었고 옆방은 큰 오빠네가 살았다.

뒷방엔 천하의 바람둥이 아저씨가 산후조리를 못해 퉁퉁부은 부인과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야반도주해서 우리 집에 세를 들어왔다. 바람둥이 아저씨를 기억하는 것은 중학생인 나를 마주치자 말을 걸면서 글쎄 내 다리를 슬쩍 만지는 것이었다. 몹시 불쾌하고 당황스런 인사법에 황당했지만 그때는 페미니즘을 알지 못한 관계로 그냥 넘어갔다. 그는 바람둥이계의 달인이었음에 틀림없다.

나란히 일렬로 지어진 판자촌에서 나는 관찰자의 시선으로 내 이웃들의 희로애락을 많이도 보았다. 70년대 막 불기 시작한 산업화에도 여전히 일자리가 없어서 거친 생존 앞에 인간에 대한 존엄과 자부심 그리고 타인에 대한 배려 보다는 목구멍에 풀칠하는 것이 더 중요해 보였다. 

대부분 삶에 눌려 거칠었고 시끌벅적 요란한 싸움판도 마다하지 않았다. 판자촌 바로 앞에 2층 양옥집이 있었다. 살찌고 너그러워 뵈는 집주인 목사님은 판자촌 아낙들에게 집안 텃밭에 가꾸어 놓은 채소들을 마음껏 뜯어가게 했다. 

옆집 아들은 공부를 잘했지만 중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에 취직했다.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양옥집 목사님 아들 과외선생님이 되었다. 그 바로 옆집은 아들만 셋이었는데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맨날 바깥으로 끌어내어 졌다. 

어느 날 동네 마당에서 놀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다가왔다. 나와 옆집 삼형제가 같이 이야기를 들었는데, 후에 그들 삼형제는 모두 여호와의 증인이 되어서 전도를 하고 다녔다.

변두리 인생에서 산업화와 맞물려 열심히 살아 내셨던 언니 오빠들 덕분에 나는 인생의 세찬 바람은 맞지 않고 컸다. 셋째 오빠와 큰 언니는 교회에서 운영하는 전수학교를 다니며 공장에 다녔다. 셋째 오빠는 현대문학을, 큰 언니는 문학사상을 구독하였다. 

나는 유년 시절부터 책읽기를 좋아했기에 뚝방동네의 소란함에도 불구하고 온갖 세계문학 전집과 한국문학에 심취하였다. 학교 앞 서점에서 200원짜리 삼중당 문고를 한 권 사서 버스 안에서 읽다보면 집에 도착할 때 벌써 다 읽어버렸다. 

깊숙한 사유보다 다음 책이 궁금해 못 견뎌서 또 책을 펼쳐야 했던 그때는 얼마나 자의식이 빵빵하게 부풀었던지. 다행히 나는 공부를 너무 잘했다.

둘째 오빠는 군대를 다녀온 후 택시운전사가 되어 큰 오빠 대신 집안의 가장노릇을 하며 큰 오빠네 사업 빚 마져 간간이 해결해줘야 했다. 셋째 오빠는 큰 오빠를 따라 철강업에 종사했는데 구로동에서 한라철강이라는 가게를 운영했다. 후에 정리하는 동안 근처 영풍문고에서 책을 3천권을 읽었다고 했다.

막내 오빠와 나만 유일하게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막내 오빠는 1980년 5.18민주항쟁 때 "군대에서 광주에 투입되었다"고 딱 한 마디 말을 했다. 막내 오빠는 셋째 오빠 밑에서 일을 했는데 결국 흐지부지 인생길을 걸었고 가끔 나는 군시절 5.18경험이 셋째 오빠의 인생을 무채색으로 만들지는 않았을까 짐작할 뿐이었다.

나는 후배들의 바램과는 달리 작가의 길은 선택하지 않았다. 나의 20대 시절에도 여전히 나의 오빠들과 언니는 서울이라는 정글에 정주하기 위해 열심히 살고 있었다. 

'살아남는다는 것, 먹고 산다는 것은 신성한 것'이기에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 가슴 먹먹할지언정 그 분들에게 슬픔을 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나에게 '경계를 가로지르는 자(boundary crosser)'라고 스스로 명명하였다. 변화하는 세상을 연어처럼 거슬러 올라가며 여러 이데올로기에 잠식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나는 이야기 채집가로서 이 땅에서 꿋꿋하게 살아오신 많은 엄니들과 아버지들의 구술을 듣고 기록하리라. 

어릴 때부터 새벽녘까지 중독적으로 책을 읽으면서 현실과 문학의 세계를 넘나들었던 것은 인간에 대한 탐구였고 오늘 내가 만나 기록을 통해 존재 의미를 밝혀내는 것은 고귀한 행위이다.

굽이굽이 고비를 건너와 꽃 한송이로 피어난 그 분들을 만나면 나는 언제나 첫 마음으로 순수하게 찬탄하고 경배하며 이야기를 듣는다.

다양한 굽이길에서 인간은 모두 존엄하고 존귀하니, 그러니 우리 사라지지 말 것이다.

 

이연자 작가의 삶과 문학이 녹아 있는 추억 편린들(사진=추억의 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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