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자의 사람사는 이야기] 옥천군 안남면 모산마을 김월렬 어르신 (2회)
자식 잃은 슬픔은 가슴에 묻고 비법 환을 팔아 집안 일으켰다
슬픔을 가슴에 묻다
땅은 있었는데 두서없이 운영하게 되어 시아버지가 장리쌀(쌀 1말 빌리면 나흘 일해주고 갚는다. 장예쌀 이라고도 불렀다)을 해서 먹고 살았는데 그 와중에 남편은 자유당 출마 국회의원 선거운동 하느라 빛을 많이 졌다.
그 땐 활동 좀 하는 남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어떤 모양이든 선거판에서 입지를 다지고 싶어 했다. 선거를 도운 국회의원이 당선되면 덩달아 출세하려는 사람들이 벌떼처럼 드나들던 곳이다. 그 모양새는 예나 지금이나 별 차이 없지 싶다. 우리 집 양반의 일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평소엔 부처님인데 술만 들어가면 곤조를 피우고 괴롭혀서 동네가 시끄러웠다.
윗마을 아랫마을 거나하게 술 취한 남정네들 소리가 저녁마다 들리던 때다. 큰 딸은 역시 살림밑천 이었다. 국민학교 졸업하고 평택에서 공장을 다니며 동생을 불러들였다. 동생들 공부시키고 입히고 키웠다. 같은 형제로 태어나서 어미 노릇을 하는 큰 딸이 대견하지만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혼자 삭히며 가슴에 품을 수 밖에 없었다.
맏이들이 무슨 죄가 있어 헌신을 당연하듯이 여겼고 그 마음이 가정을 지키던 안타까운 때 였다. 둘째 아들은 샷시 만든느 일을 배워 우리에게 소도 사주고 땅도 사주었다. 학교 공부를 많이 못했지만 마음 씀씀이가 남달라 우리 집 대들보 같은 아들이었다.
그런 둘째가 배앓이가 끊이지 않아 밥도 못 먹으며 시름시름 앓더니 병원에 입원한 지 3개월만에 췌장암으로 죽고 말았다. 그런 병이 있는 지도 몰랐던 무시무시한 암이었다. 가슴이 찢어지고 썩어가는 고통을 거기에 비할 수 있을까. 생때같은 아들을 보내고 웃고 밥도 먹으면서 나는 나대로 살아진다.
그 애를 낫게 할 수 있다면 미국에라도 보내려 했으나 암만 돈 있어도 못 고친다 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다는 말을 난 그 때 똑똑히 알았고 그때부터 내가 혼절해서 정신이 나가더니 총기가 흐려졌다. 새끼 앞서 보내는 애미 마음은 절대 온전할 수 없다.
비법 환을 만들어 팔아 집을 일으켰다
모산은 숲이 우거지고 땅이 비옥해서 약초들이 지천이었다. 7월부터 겨울 될 때까지 논두렁 밭두렁에서 소태잎, 구절초, 인진쑥, 우슬뿌리, 또 한 가지가 뭐더라? 암튼 다섯가지 잎을 뜯어서 볕 좋을 때 바짝 말려서 절구에 빻아놓는다.
방앗간에서 아주 곱게 보릿가루를 내서 국수 반죽을 만들고 미리 만들어 둔 다섯가지 가루와 섞어서 환을 만들었다. 송편 빚듯이 정성들여 곱게 만들었다. 살림 밑천이었으며 상비약이라 모산 마을 사람들에게는 보물단지였다. 거기다가 산에서 캔 칡을 깨끗이 씻어서 망치로 두들겨 부드럽게 한 후 가마솥에 삶는다. 물만 짜서 하루를 졸이면 끈적끈적하니 조청처럼 되는데 미리 만들어 놓은 환에다 붓으로 칠하면 까무족족 반질반질해진다.
배 아프고 삭신 쑤시는 신경통에 특효 환인데 안남면 사람들 대대로 내려 온 집안 비법이다. 농사가 끝난 겨울에 나는 2가마니씩 만들었다. 그걸 옥천과 이웃 동네에 팔아서 큰아들 대학까지 가르쳤다.
사실 가르칠 여력이 없어 충남대 시험 치러 갈 때 면접에서 떨어지길 바랬는데, 내 어깨를 주무르며 "엄마, 합격했어요"하고 말하자 가슴이 덜컥 내려 앉은 것도 이제 옛일이다. 공부 잘하는 내 새끼 학교 떨어지라는 그 마음이 오죽했을까만은 먹고 살기도 힘든 때, 대학 공부 시키는 게 엄두가 안 났다. 그래서 이모저모 살 궁리를 하면서 겨울 내 약초환을 만든 것이다.
그렇게 또 인생은 어쨌든 살아진다. <다음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