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보면, 비」 ...이정숙 시집
진부하기 쉬운 비라는 소재는 시인의 진정성 때문에 진지한 비유로 탈바꿈
2019-12-07 한국관세신문
「뒤돌아보면, 비」
저녁비가 소슬하게 내린다 모두가 바쁘게 돌아가는 시간
불빛이 명멸하듯 시들어지면 빗줄기는 굳은 길목으로 파고든다
깊은 어둠속으로 흘러가는 길 어느 창백한 가로등 아래 서면
우수(憂愁)로 부르튼 날들 가슴깊이 젖어드는데
무심히 발길 닿는 곳마다 물웅덩이 마음속에 쌓인 눈물일까
끝내 비워내지 못한 채 서성이며 안개가 밀어낸 바람결에
소리 없이 찾아 드는 슬픔 거기, 꺼지지 않는 한 시절
그 빗속을 거닐고 있다.
비를 눈물로 비유하는 다소 상투성을 보여주긴 하지만 골목과 비를 함께 등치시키는 것으로 독특한 효과를 내고 있다.
자신이 살아온 모든 길이 이 슬픔으로 점철되어 있음을 느끼게 만들어 준다. 이 슬픔의 정체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꺼지지 않는 한 시절'이라는 말에서 불빛처럼 항상 자신의 길을 밝혀주고 있는 어떤 그리움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그 그리움이 모든 슬픔의 근원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뒤돌아보면"이라는 제목 표현이다. 자신의 삶이 이 그리움으로부터 항상 멀어져 가는 방향으로 진행돼 왔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운 대상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그것의 부재는 더욱 강화되고 그만큼 슬픔은 더 커져가는 삶을 살아온 것이다. 자칫 진부할 수 있는 비라는 소재가 진지한 비유로 탈바꿈한 이유는 바로 삶을 대하는 이런 진정성 때문일 것이다.
이정숙 시집 「뒤돌아보면, 비」
도서출판 지혜, 값 9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