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주석보다 총서기, 직함보다 인사·군권…중국 권력 77년을 읽는 법
[한국관세신문=정도현 기자|광저우.호치민]
중국 정치를 설명할 때 한국에서 가장 많이 쓰는 표현 가운데 하나가 ‘중국 국가주석’이다.
틀린 표현은 아니다.
다만 중국의 권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이해하기에는 부족하다.
중국에서 최고지도자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 직책은 국가주석보다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다. 여기에 인민해방군을 지휘하는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함께 갖고 있느냐가 결정적이다.
현재 시진핑(習近平)은 총서기·국가주석·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동시에 맡고 있다. 2026년 현재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회 역시 시진핑과 리창(李強)·자오러지(趙樂際)·왕후닝(王滬寧)·차이치(蔡奇)·딩쉐샹(丁薛祥)·리시(李希) 등 7명 체제가 유지되고 있다.
중국공산당 당장도 총서기가 정치국과 정치국 상무위원회 회의를 소집하도록 하고, 중앙군사위원회에는 주석책임제를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중국의 권력을 알려면 국가기관 조직도보다 먼저 세 가지를 봐야 한다.
당권, 인사권, 군권이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중국의 최고권력은 이 세 가지를 누가, 어떤 방식으로 장악했느냐에 따라 계속 모습을 바꿔왔다.
마오쩌둥, 제도보다 강했던 혁명지도자
1949년 중국의 최고권력은 마오쩌둥(毛澤東)이었다.
마오는 단순한 국가수반이 아니었다.
공산혁명을 승리로 이끈 최고지도자였다.
그의 권력은 헌법이나 국가주석이라는 직책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혁명경력과 군에 대한 권위, 당내 카리스마가 결합했다.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마오의 개인권력은 당과 국가제도의 정상적인 작동을 넘어서는 수준까지 확대됐다.
류사오치(劉少奇)가 국가주석이었음에도 정치적으로 제거됐고, 덩샤오핑(鄧小平) 역시 여러 차례 실각했다.
중국 현대사에서 개인의 정치적 권위가 가장 강했던 시기를 고른다면 마오 시대를 빼기 어렵다.
그러나 마오가 1976년 사망하면서 한 가지 문제가 남았다.
그 정도의 권력을 누가 이어받을 수 있느냐는 문제였다.
답은 ‘아무도 그대로 이어받지 못했다’였다.
직함은 화궈펑, 실제 권력은 덩샤오핑에게
마오 사후 화궈펑(華國鋒)이 후계자로 등장했다.
화궈펑은 중국공산당 주석과 국무원 총리,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한때 모두 맡았다.
직함만 보면 당·정·군을 완전히 장악했다.
1976년에는 장칭(江青) 등 이른바 4인방(四人幫)을 체포하며 문화대혁명의 정치적 혼란을 정리했다.
그런데 몇 년 뒤 중국의 실질적 최고권력자는 화궈펑이 아니라 덩샤오핑이 됐다.
이 장면은 중국 권력의 특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직함이 있다고 권력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가진 사람이 직함을 움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덩샤오핑은 국가주석도 아니었고 장기간 당 총서기를 맡지도 않았다.
그런데 중국의 개혁·개방을 설계했고 중요한 인사를 결정했으며 국가의 진로를 바꿨다.
혁명원로라는 권위와 군에 대한 영향력, 당내 인사결정권이 있었기 때문이다.
덩의 시대를 보면 중국정치를 대통령제의 시각으로 이해하면 안 되는 이유가 가장 분명해진다.
덩은 마오식 권력을 없애려 했다
덩샤오핑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유산 가운데 하나는 경제개혁만이 아니다.
마오 시대처럼 한 사람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정치가 다시 나타나지 않도록 지도체제를 일정 부분 제도화하려 했다는 점이다.
당과 국가의 지도부를 세대교체하고 원로들이 무기한 공식직을 차지하는 관행을 줄이려 했다.
하지만 덩 자신은 역설적으로 그 제도 밖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후야오방(胡耀邦)과 자오쯔양(趙紫陽)이 총서기를 맡았지만 정치적 위기가 닥쳤을 때 최종 판단권은 덩과 혁명원로들에게 있었다.
1989년 톈안먼 사태 이후 자오쯔양이 실각하자 상하이시 당서기였던 장쩌민(江澤民)이 중앙으로 불려왔다.
이때부터 중국정치는 또 다른 단계로 들어간다.
개인 한 사람보다 정치국 상무위원회와 인사 네트워크가 중요해지는 시대다.
장쩌민과 함께 등장한 ‘상하이방’
장쩌민은 상하이시장을 거쳐 상하이시 당서기를 지냈다.
중앙으로 올라온 뒤에는 상하이에서 함께 일했거나 자신과 정치적 관계를 맺었던 간부들이 중앙 권력으로 진출했다.
쩡칭훙(曾慶紅), 황쥐(黃菊), 우방궈(吳邦國) 등이 대표적으로 거론됐다.
외부 중국정치 연구자들은 이 네트워크를 ‘상하이방(上海幫·Shanghai Gang)’이라고 불렀다. 브루킹스의 중국 엘리트 정치 연구에서도 장쩌민 주변 상하이 인맥은 당시 주요 정치 네트워크 가운데 하나로 분석됐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다.
중국공산당 조직도 어디에도 ‘상하이방’이라는 조직은 존재하지 않는다.
당원 명부에도 없다.
상하이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두 같은 정치파벌이라고 볼 수도 없다.
상하이방은 장쩌민과의 후견관계와 승진경로를 중심으로 외부 연구자들이 분류한 정치 네트워크에 가깝다.
이 점은 공청단파와 태자당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중국의 계파는 ‘비밀결사’보다 인사 네트워크다
중국정치에서 계파를 지나치게 신비롭게 볼 필요는 없다.
수십 년 동안 같은 지역과 조직에서 근무한 관료들이 정치적 신뢰를 쌓는다.
한 사람이 중앙으로 올라가면 자신이 능력을 알고 신뢰하는 사람을 주요 자리에 발탁한다.
그 사람이 다시 다른 간부를 끌어올린다.
그 과정이 반복되면 하나의 정치 네트워크가 만들어진다.
한국 정치에서 말하는 ‘○○계’ 또는 ‘○○라인’과 비슷한 부분이 있지만, 중국은 공산당 일당체제 안에서 간부의 경력이 수십 년 동안 지방과 중앙을 오가기 때문에 이런 인적 관계의 지속성이 더 강할 수 있다.
그래서 중국정치를 볼 때는 사람의 고향보다 이력서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
누구와 어디에서 함께 근무했는가.
누가 그를 발탁했는가.
어떤 지방과 부처를 거쳐 올라왔는가.
결국 계파란 이런 정치적 경력의 지도다.
후진타오 시대, 공청단이 맞섰다
후진타오(胡錦濤)는 장쩌민과 다른 경로로 성장했다.
그의 중요한 정치 경력 가운데 하나가 중국공산주의청년단, 즉 공청단(共青團)이었다.
공청단을 통해 정치적으로 성장한 간부들을 중국정치 연구에서는 ‘공청단파’ 또는 ‘단파(團派·tuanpai)’라고 불렀다.
리커창(李克強), 왕양(汪洋), 후춘화(胡春華), 리위안차오(李源潮) 등이 대표적으로 분류됐다.
브루킹스의 당시 분석에서는 공청단 계열 인사들이 비교적 내륙지역과 지방행정 경험을 많이 갖고 있으며 농민·농민공·도시 저소득층 등 사회적 형평 문제를 상대적으로 중시하는 정치적 성향을 보인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역시 공식 정파는 아니었다.
공청단이라는 공통된 승진경로를 가진 인사들의 정치 네트워크에 가까웠다.
장쩌민의 상하이방, 후진타오의 공청단
2000년대 중국정치를 설명할 때 가장 많이 등장했던 구도가 바로 이 두 세력이었다.
상하이방 대 공청단파.
여기에 태자당까지 얹으면 당시 중국정치의 권력지도를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었다.
일부 중국정치 연구에서는 상하이방과 태자당을 엘리트 연합, 공청단 출신 인사들을 상대적으로 대중·사회정책을 강조하는 연합으로 나누기도 했다.
후진타오 시대 정치국 상무위원회에는 서로 다른 인맥과 정책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공존했다.
이 때문에 후진타오 시기는 중국 현대정치에서 상대적으로 ‘집단지도체제’의 성격이 강했던 시기로 평가된다.
2017년 19차 당대회를 분석할 때조차 외부 연구자들은 당시 상무위원 구성을 공청단 계열과 장쩌민계의 균형이라는 틀에서 분석할 정도였다.
한 사람이 모든 권력을 독점하기보다는 여러 네트워크가 상무위원회 안에서 견제와 타협을 하는 방식에 가까웠다.
물론 서구 민주주의의 권력분립과 같은 것은 아니었다.
모두 공산당 안에서 벌어지는 권력배분이었다.
태자당, 중국의 ‘혁명 2세’
여기에 또 하나의 이름이 등장한다.
태자당(太子黨)이다.
중국 혁명원로나 고위 지도자의 자녀들을 일컫는 말이다.
시진핑이 대표적이다.
그의 아버지 시중쉰(習仲勳)은 중국공산당 혁명원로였고 국무원 부총리 등을 지냈다.
보시라이(薄熙來)의 아버지 보이보(薄一波) 역시 혁명원로였다.
그러나 태자당을 하나의 단일 정치파벌로 보면 정확하지 않다.
브루킹스 연구에서도 태자당은 상하이방이나 공청단 인맥보다 내부 결속력이 약하고 정치성향도 다양하다고 분석했다.
같은 혁명원로의 자녀라도 정치적 이해관계가 전혀 다를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시진핑과 보시라이였다.
2012년, 두 태자당의 운명이 갈렸다
2010년대 초 중국정치를 이야기할 때 시진핑과 보시라이는 모두 주목받는 태자당 정치인이었다.
시진핑은 푸젠(福建)·저장(浙江)·상하이를 거치며 지방행정 경험을 쌓았다.
보시라이는 다롄시장과 랴오닝성장 등을 거쳐 충칭시 당서기가 됐다.
충칭에서는 ‘창훙다헤이(唱紅打黑)’라는 구호 아래 혁명가요를 장려하고 조직범죄를 강하게 단속하면서 전국적인 정치적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2012년 왕리쥔(王立軍) 사건을 시작으로 정치적 위기가 터졌고 보시라이는 실각했다.
같은 해 11월 시진핑은 중국공산당 총서기가 됐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태자당이 승리했다’가 아니다.
태자당 출신의 시진핑이 승리했다.
태자당 전체가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집권한 것은 아니었다.
시진핑이 군권까지 곧바로 넘겨받은 의미
2012년 중국 최고권력 교체에서 중요한 장면 하나가 있었다.
시진핑은 총서기가 되면서 중앙군사위원회 주석도 동시에 맡았다. 중국공산당 공식 기록도 18기 1중전회에서 시진핑이 총서기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동시에 선출됐음을 확인한다.
후진타오와 달랐다.
후진타오는 2002년 총서기가 됐지만 장쩌민이 일정 기간 군사위 주석을 유지했다.
시진핑은 집권 첫날부터 당권과 군권을 함께 장악할 수 있는 구조를 확보했다.
당시에는 이것이 앞으로 중국정치의 성격을 얼마나 크게 바꿀지 정확히 예상하기 어려웠다.
외부에서는 여전히 상하이방과 공청단파, 태자당 사이의 균형이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하지만 이후 10여 년 동안 벌어진 일은 달랐다.
푸젠·저장·상하이에서 함께 일한 사람들이 올라왔다
시진핑의 권력이 강화되면서 또 다른 계파 이름들이 나타났다.
푸젠성에서 함께 근무한 인사들을 ‘민강신군(閩江新軍)’이라고 불렀다.
저장성 시절 인맥을 ‘즈장신군(之江新軍)’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상하이 근무 인맥과 아버지 시중쉰을 통해 연결된 산시(陝西) 지역 혁명인맥도 분석 대상이 됐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이들을 여러 파벌로 잘게 나눠 보는 것은 오히려 중국 권력구조를 복잡하게 만든다.
공통점은 하나다.
시진핑과 과거 함께 근무했거나 그에게 정치적 신뢰를 받은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시진핑의 지방근무 시절 형성된 인맥이 집권 이후 중앙 권력으로 이동했다는 점은 중국 엘리트 정치 연구에서도 오래전부터 분석돼왔다.
현재 총리 리창은 저장성에서 시진핑과 함께 근무했다.
차이치는 푸젠과 저장에서 시진핑과 오랜 정치적 인연을 맺었다.
딩쉐샹은 상하이에서 시진핑을 보좌한 뒤 중앙에서 핵심 참모로 성장했다.
과거라면 각각 ‘저장방’, ‘푸젠방’, ‘상하이 인맥’으로 분류했겠지만 이제는 시진핑 중심의 인사 네트워크라고 보는 편이 현실적이다.
반부패운동이 권력지도를 흔들었다
시진핑 집권 뒤 중국정치의 가장 큰 변화 가운데 하나가 반부패운동이었다.
‘호랑이와 파리를 함께 잡는다’는 구호 아래 중앙과 지방, 당과 정부, 군을 가리지 않고 사정작업이 진행됐다.
반부패는 실제로 중국공산당의 심각한 부패 문제를 겨냥한 것이었다.
동시에 결과적으로 기존 권력 네트워크도 크게 흔들렸다.
장쩌민 시절 최고지도부와 연결됐던 인사들이 낙마했고, 후진타오 시대의 핵심 인물들도 사정대상이 됐다.
군 고위층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여기에서 기사를 쓸 때 주의할 점이 있다.
모든 반부패 사건을 ‘정적 제거’라고 단정하면 확인되지 않은 정치적 추론이 된다.
반대로 정치적 효과가 전혀 없었다고 말하는 것도 현실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부패척결이라는 공식 목적과 권력 재편이라는 정치적 결과가 동시에 나타났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중국 최고위 정치과정은 외부에 완전히 공개되지 않기 때문에 어느 사건에서 어느 요소가 얼마나 작용했는지는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
공청단파는 왜 힘을 잃었나
시진핑 시대 가장 분명한 변화는 공청단 계열의 영향력 감소다.
후진타오 시대에는 공청단 경력이 최고지도자가 되는 하나의 주요 경로로 인식됐다.
리커창은 국무원 총리가 됐고 왕양은 정치국 상무위원까지 올랐다.
후춘화는 광둥성 당서기와 국무원 부총리를 지내며 한때 차세대 지도자 후보로 널리 거론됐다.
하지만 시진핑 체제가 장기화되면서 공청단이라는 경력 자체가 독립적인 최고권력 기반으로 기능하는 모습은 약해졌다.
현재 정치국 상무위원 7명을 보면 과거 후진타오 시대처럼 ‘공청단파 대 장쩌민계’라는 구도로 설명하기 어렵다. 현 지도부의 구성 자체가 2022년 20기 1중전회에서 확정됐고 2026년에도 유지되고 있다.
공청단 조직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공청단파라는 독립된 최고권력 연합의 시대는 사실상 저물었다고 보는 분석이 많다.
상하이방도 같은 길을 걸었다
상하이방도 마찬가지다.
장쩌민 시대와 후진타오 초기에는 중국정치에서 가장 강력한 인사 네트워크였다.
그러나 세대가 바뀌었다.
대표 인물들이 은퇴했고 장쩌민도 세상을 떠났다.
상하이 근무경력이 있는 간부는 지금도 많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 사람을 장쩌민계라고 부를 수는 없다.
현재 중국정치에서 중요한 질문은 ‘상하이 출신인가’보다 ‘누구의 신뢰를 받고 어떤 핵심조직을 맡고 있는가’에 더 가깝다.
과거의 계파지도로 현재를 읽으면 지도는 있는데 길이 맞지 않는 현상이 생긴다.
그렇다면 계파정치는 끝났나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된다.
상하이방과 공청단파의 영향력이 약해졌다고 중국에서 인맥정치와 권력경쟁이 사라졌다는 뜻은 아니다.
중국공산당은 거대한 관료조직이다.
지방정부가 있고 중앙부처가 있다.
조직부와 기율검사기구가 있다.
공안·정보·안보 조직이 있다.
군도 있다.
대형 국유기업과 금융기관도 당의 인사체계와 연결돼 있다.
수많은 관료 네트워크와 이해관계가 존재한다.
다만 과거처럼 두세 개의 거대한 계파가 최고지도부에서 공개적으로 균형을 이루는 듯한 구도는 약해졌다.
현재는 강한 최고지도자 아래에서 여러 관료·지역·기관 네트워크가 경쟁하는 구조로 보는 편이 더 적절하다.
카네기재단의 최근 분석에서도 시진핑 집권 2기에 들어 당 지도체계와 군의 지휘계통, 중앙과 지방의 관계에서 중앙의 통제가 매우 강해진 점이 강조된다.
2018년, 권력 장기화의 제도적 신호
시진핑 시대의 성격을 보여준 결정적 사건 가운데 하나가 2018년 헌법 개정이었다.
국가주석의 연임 제한이 삭제됐다.
중국공산당 측은 당시 총서기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는 이미 2연임 제한이 없었기 때문에 당·국가·군의 ‘삼위일체’ 지도체제를 일치시키기 위한 제도적 조정이라고 설명했다.
결과적으로 시진핑은 2022년 세 번째 총서기 임기를 시작했고 2023년 세 번째 국가주석 임기에 들어갔다.
현재 시점에서 중국 권력을 분석할 때는 더 이상 ‘두 번의 5년 임기 뒤 후계자가 등장한다’는 과거의 관행을 자동적으로 적용할 수 없게 됐다.
시진핑은 마오와 같은가
시진핑에게 자주 붙는 표현이 있다.
‘마오 이후 가장 강력한 중국 지도자.’
권력집중 정도를 설명하는 표현으로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마오와 시진핑의 권력방식은 다르다.
마오는 혁명적 카리스마와 대중동원을 통해 기존 당 조직마저 흔들 수 있었다.
문화대혁명은 그 극단적인 사례다.
시진핑은 오히려 반대다.
당 조직과 당의 규율을 강화하고 중앙의 각종 영도기구를 확대하면서 강화된 공산당 조직의 정점에 최고지도자를 놓는 방식에 가깝다.
중국공산당 공식 규정도 현재 중앙위원회·정치국·정치국 상무위원회·총서기라는 수직적 지도체계를 명확히 하고 있으며 중앙군사위원회에는 주석책임제를 두고 있다.
마오가 때로 제도를 넘어선 지도자였다면 시진핑은 강화된 당 제도를 통해 권력을 집중시킨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마오에서 시진핑까지 권력은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지 않았다
1949년 이후 중국 최고권력의 흐름을 단순하게 정리하면 이렇다.
마오쩌둥 시대에는 개인의 혁명적 권위가 강했다.
덩샤오핑 시대에는 원로와 군, 인사권을 가진 실질적 지도자가 공식 직책 바깥에서도 중국을 움직였다.
장쩌민·후진타오 시대에는 정치국 상무위원회와 여러 인사 네트워크 사이의 균형이 중요해지면서 집단지도체제의 성격이 강화됐다.
시진핑 시대에는 다시 당 중앙과 최고지도자에게 권력이 집중됐다.
즉
개인권력 → 원로정치 → 집단지도와 계파균형 → 권력 재집중
이라는 흐름이다.
중국은 같은 공산당이 77년 동안 집권했지만 최고권력을 운영하는 방식은 계속 달라졌다.
중국에서는 왜 당서기가 시장보다 중요한가
이 권력구조를 중앙정치 이야기로만 보면 피부에 와닿지 않을 수 있다.
지방으로 내려가면 훨씬 쉽게 보인다.
한국 기업인이 중국에 처음 진출하면 시장이나 성장(省長)이 지역의 최고책임자라고 생각하기 쉽다.
한국의 행정구조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 지방정치에서는 일반적으로 시장보다 시 당위원회 서기, 성장보다 성 당위원회 서기의 정치적 위상이 높다.
이것은 중앙과 같은 원리다.
정부가 행정을 담당하지만 정치의 방향은 당이 정한다.
중국공산당 당장은 전국대표대회가 열리지 않는 동안 중앙위원회가 당의 전체 업무를 지도하며 정치국과 상무위원회가 중앙위원회의 권한을 행사하도록 규정한다.
그래서 중국 기업과 지방정부를 상대하다 보면 어느 순간 질문도 달라진다.
‘시장과 친한가’만 묻지 않는다.
‘당서기가 누구인가’를 보게 된다.
중국정치에서는 말보다 ‘자리의 이동’이 더 중요할 때가 있다
중국은 서구식 공개경선으로 최고지도부를 뽑는 체제가 아니다.
따라서 권력의 변화를 읽는 방식도 다르다.
누가 무슨 말을 했느냐 못지않게 누가 어디로 이동했느냐가 중요하다.
어느 성의 당서기가 베이징으로 올라왔는가.
누가 중앙판공청을 맡았는가.
누가 중앙조직부와 기율검사기구, 공안·안보 분야를 맡았는가.
어떤 군 장성이 승진했는가.
누가 정치국원이 되고 누가 빠졌는가.
중국정치에서는 인사 그 자체가 정치적 메시지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계파를 읽을 때도 소문보다 이력을 먼저 봐야 한다.
‘누구 사람인가’만 봐도 틀린다
그렇다고 모든 중국 고위간부를 ‘누구 사람’이라는 한마디로 분류해서도 안 된다.
중국은 14억 인구를 운영하는 거대한 관료국가다.
간부의 승진에는 지방행정 경험과 성과, 전문성, 연령, 중앙과 지방의 배치, 당의 정책방향과 정치적 신뢰 등 여러 요인이 작용한다.
누군가 시진핑과 저장에서 함께 근무했다고 해서 오직 개인적 인연 때문에 모든 자리에 올랐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낙마했다고 해서 반드시 반대계파였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중국정치의 불투명성이 클수록 분석은 더 자극적이 되기 쉽다.
하지만 기사에서는 반대로 가야 한다.
확인되는 인사경력과 정치적 해석을 구분해야 한다.
중국 권력을 굳이 등급으로 나눌 수 있을까
역대 지도자의 개인권력 집중도를 비교하는 것도 조심스럽다.
시대와 제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권력의 집중 정도만 놓고 보면 마오쩌둥이 가장 강한 개인권력을 행사했다고 보는 데 큰 이견은 많지 않다.
그다음 덩샤오핑과 시진핑은 매우 강한 최고지도자로 볼 수 있지만 방식이 다르다.
덩은 공식 최고직보다 원로로서의 권위와 군권, 인사결정력으로 움직였다.
시진핑은 총서기·중앙군사위 주석과 강화된 당 중앙체제를 통해 공식 조직의 정점에서 권력을 행사한다.
장쩌민은 자신의 강한 정치적 기반과 상하이 인맥이 있었지만 다른 원로와 정치국 상무위원을 고려해야 했다.
후진타오 시대는 이들 가운데 상대적으로 집단지도 성격이 가장 강했다.
따라서 단순한 권력집중도라면 대략
마오 → 덩·시 → 장 → 후
정도로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권력의 ‘크기’를 비교한 것이지 지도자의 성과와 역사적 평가를 순위로 매긴 것은 아니다.
상하이방·공청단·태자당을 왜 알아야 하나
지금 시점에서 이 세 계파의 힘이 과거보다 약해졌는데도 알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
중국 권력이 현재의 형태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상하이방을 보면 장쩌민이 어떻게 퇴임 뒤에도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공청단파를 보면 후진타오 시대의 집단지도와 계파균형이 보인다.
태자당을 보면 혁명원로의 가족 네트워크가 개혁·개방 이후에도 중국 엘리트 정치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세 가지를 지나 시진핑 시대를 보면 무엇이 달라졌는지가 보인다.
과거에는 최고지도자가 여러 계파 사이의 균형점에 가까웠다면 현재는 여러 네트워크가 최고지도자를 중심으로 재편된 모습이 더 강하다.
이 차이가 지금 중국을 이해하는 핵심이다.
중국에서 권력을 읽는 세 가지 방법
중국에서 오래 생활하며 정치와 지방행정, 기업 현장을 지켜보면 중국의 권력을 이해하는 방법은 결국 세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직함보다 당을 본다.
국가주석이라는 이름만 보지 말고 중국공산당 총서기가 누구인지 봐야 한다.
지방에서도 시장보다 당서기가 중요하다.
둘째, 당을 보려면 인사를 본다.
누가 누구를 발탁했는가.
어디에서 함께 근무했는가.
누가 정치국과 상무위원회, 핵심 당기구로 올라가는가.
중국에서 인사는 권력의 가장 중요한 언어 가운데 하나다.
셋째, 최고권력을 알려면 군권을 본다.
중국공산당 당장은 중앙군사위원회에 대해 주석책임제를 명시한다.
덩샤오핑의 실질적 권력을 이해할 때도 군을 빼놓기 어렵고, 시진핑이 2012년 총서기와 군사위 주석을 동시에 넘겨받은 의미도 여기에서 나온다.
상하이방도, 공청단도 결국 사람의 역사였다
중국정치를 이야기하다 보면 제도가 복잡해 보인다.
중앙위원회.
정치국.
정치국 상무위원회.
국무원.
전국인민대표대회.
중앙군사위원회.
하지만 그 조직을 연결하면 결국 사람이 나온다.
마오에게는 혁명의 동지와 군이 있었다.
덩에게는 원로와 개혁파 간부들이 있었다.
장쩌민에게는 상하이에서 함께 일한 사람들이 있었다.
후진타오에게는 공청단을 거쳐 성장한 인맥이 있었다.
시진핑에게는 푸젠과 저장·상하이를 거치며 형성된 정치적 신뢰 네트워크가 있다.
계파의 이름은 달라졌지만 권력을 움직이는 한 가지 원리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사람을 어디에 배치하느냐가 권력을 만든다는 것이다.
77년 동안 변하지 않은 것은 공산당이었다
1949년 이후 중국은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됐다.
인민공사는 사라졌다.
경제특구가 생겼다.
외국기업이 들어왔다.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 됐고 세계 2위 규모의 경제를 가진 국가로 성장했다.
지도자의 권력방식도 계속 바뀌었다.
마오의 개인권력.
덩의 원로정치.
장쩌민과 후진타오 시대의 집단지도와 계파균형.
그리고 시진핑 시대의 권력 재집중.
그러나 한 가지 중심축은 유지됐다.
중국공산당이다.
현재 당장 역시 전국대표대회가 열리지 않는 동안 중앙위원회가 당의 모든 업무를 지도하고 정치국과 정치국 상무위원회, 총서기가 그 핵심 지도체계를 구성하도록 규정한다.
국가주석이라는 직함만 보고 중국을 이해할 수 없는 이유다.
앞으로 봐야 할 것은 ‘다음 계파’가 아니라 ‘다음 승계 방식’
그래서 앞으로 중국정치를 볼 때 더 중요한 질문은 “상하이방이 부활할 것인가”나 “공청단파가 다시 올라올 것인가”가 아닐 수 있다.
오히려 더 중요한 질문이 있다.
시진핑 이후 중국은 어떤 방식으로 최고권력을 넘길 것인가.
덩샤오핑 이후 중국은 한동안 최고지도부의 세대교체와 집단지도 관행을 만들어갔다.
시진핑 시대에는 그 관행 가운데 일부가 달라졌다.
현재 당장상 총서기와 중앙군사위 주석에는 연속 재임 횟수 제한이 명시돼 있지 않고, 2018년에는 국가주석의 연임 제한도 삭제됐다. 중국공산당 측은 이를 당·국가·군 최고지도체제의 일치를 위한 조치로 설명했다.
그렇다면 다음 승계는 언제, 어떤 규칙으로, 누구에게 이루어질 것인가.
현재 공개된 자료만으로 단정할 수 없다.
바로 그 불확실성이 앞으로 중국정치를 읽을 때 가장 중요한 변수 가운데 하나다.
중국 권력은 직함이 아니라 구조다
처음 중국에 가면 국가주석을 찾는다.
조금 지나면 총서기를 보게 된다.
더 오래 들여다보면 정치국 상무위원을 본다.
그리고 결국 사람들의 경력과 군권을 보게 된다.
그래서 중국 권력을 설명하는 가장 간단한 문장은 여전히 이것이다.
중국에서 권력을 알려면 직함보다 당을 보고, 당을 알려면 인사를 보고, 최고권력을 알려면 군권을 봐야 한다.
상하이방도 공청단파도 태자당도 결국 이 세 가지를 둘러싸고 만들어진 정치 네트워크였다.
하지만 2026년의 중국 권력지도는 2000년대와 크게 다르다.
상하이방과 공청단이라는 굵은 두 선은 희미해졌다.
태자당이라는 출신배경만으로 현재 권력을 설명하기도 어렵다.
대신 여러 선이 한 곳으로 모여 있다.
시진핑이다.
그렇다고 중국정치에서 경쟁이 사라졌다고 볼 수는 없다.
거대한 공산당 조직 안에서 사람과 기관, 지역과 정책을 둘러싼 경쟁은 계속될 것이다.
다만 경쟁이 벌어지는 방식과 힘의 중심이 달라졌다.
마오에서 덩으로,
덩에서 장쩌민과 후진타오로,
그리고 다시 시진핑으로.
77년 동안 중국 최고권력은 개인과 집단 사이를 오갔다.
앞으로 중국이 다시 집단지도 쪽으로 돌아갈지, 강한 최고지도자 중심의 구조가 장기간 이어질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중국 현대정사가 알려주는 것은 분명하다.
최고권력의 얼굴은 바뀌어도, 권력을 만드는 세 축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당을 장악하고,
사람을 배치하고,
군을 지휘하는 것.
중국 최고권력은 결국 그 세 가지가 만나는 곳에 있었다.

